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문단 편집) == 전후 == 첫번째 수용소장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상술했듯 전쟁 중에 제거되었고 두번째 수용소장 고틀리프 헤링(Gottlieb Hering)은 전후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슈테틴 성[* 이름만 슈테틴 성이지 슈테틴에 있진 않았다.]에 마련된 임시 병원에서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병사했다. 나머지 간부들에 대한 재판이 뒤따라야 했겠지만 이 재판은 다른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 간부들의 경우처럼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베우제츠의 경우, 증거가 거의 완벽히 인멸된데다 당시의 경험을 증언해 줄 생존자가 절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화장된 재를 묻은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를 발굴했음에도 한동안 잊혀졌다. 현장을 보호하려는 노력도 없어서 화장 구덩이가 파헤쳐진 채로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베우제츠 마을의 선생님과 학생들이 이곳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보존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동서독 정부가 나치 전범에 대한 본격적인 추적을 개시하면서 마침내 베우제츠는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1963년 8월 서독 뮌헨 1구역 재판소에서 처음으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간부들을 대상으로 베우제츠 재판이 열렸다. 재판은 1965년 1월까지 진행되었는데 놀랍게도 기소된 8명 중 7명이 상부의 압박에 의해 악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무죄 훈방되었고 SS와 경찰 간 중재자였던 요제프 오베르하우저(Josef Oberhauser)만이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훈방된 7명 중 5명은 1965년 9월 시작된 소비보르 재판에도 기소되었는데, 5명 중 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1960년대에 베우제츠의 터는 울타리로 둘러졌고 처음으로 추모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자료가 부족해서 울타리는 베우제츠의 영역을 제대로 두르진 못했다. 게다가 베우제츠가 있던 자리에 상업 개발이 시작되기도 하는 등 터 일부가 훼손되었고 사람도 거의 찾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제대로 관리되기 시작한 트레블링카 추모 박물관과 달리 베우제츠의 터는 공산정권 시절 내내 잊혀지고 방치되었다. 공산정권이 붕괴된 뒤 상황이 바뀌었는데 많은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에 점차 관심을 가지면서 베우제츠의 위치도 알아내 개인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 정부에 수용소 터가 방치된 것에 대해 항의했고 1990년대 말에야 절멸수용소의 터를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과 더불어 베우제츠의 상세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가 시작되었다. 전후 수용소 터에 세워진 건물들은 보상을 해준 뒤 철거했다. 2004년 이곳은 마이다네크 추모 박물관의 분관으로 지정되었고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관이 세워졌다. 홀로코스트 당시 베우제츠에서 가족을 잃은 미국의 유대인 생존자 마일즈 러맨(Miles Lerman)[* 러맨의 가족은 루블린 근교에 살면서 큰 밀가루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치 침공 뒤 르부프로 피신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러맨은 비니키 노동수용소로 끌려가고 가족들은 르부프 게토에 수용되었다가 베우제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본인은 노동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끝까지 숨어 지내는 데 성공한 덕분에 살아남았다.]은 추모관 건립 당시 무려 5백만 달러를 기부해 폴란드 정부에 도움을 주었다. 이밖에도 어린 아이로서 르부프 게토에 살다 베우제츠에 끌려갈 뻔 했으나 '정의로운 폴란드인들(Polish Righteous)'이 숨겨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캐나다의 유대인 생존자 아니타 엑스타인(Anita Ekstein)[* '산 자들의 행진' 캐나다 지부의 의장이었다.] 역시 거금을 기부해 주는 등 수많은 유대인 생존자들의 도움을 받아 추모관이 완공되었다. 현재 추모관의 입구에는 [[히브리어]], [[폴란드어]], [[영어]]로 이렇게 적혀있다.[* 문서 도입부의 사진에는 영어 부분이 잘려 있다.] > '''THIS IS THE SITE OF THE MURDER[br]OF ABOUT 500 000 VICTIMS[br]OF THE BELZEC DEATH CAMP[br]ESTABLISHED POR THE PURPOSE OF KILLING[br]THE JEWS OF EUROPE, WHOSE LIVE WERE BRUTALLY TAKEN[br]BETWEEN FEBRUARY AND DECEMBER 1942[br]BY NAZI GERMANY''' > > > '''EARTH DO NOT COVER MY BLOOD,[br]LET THERE BE NO RESTING[br]PLACE FOR MY OUTCRY![br]JOB 16:18''' > > > > '''MIEJSCE MĘCZEŃSKIEJ ŚMIERCI[br]OKOŁO 500 000 OFIAR[br]OBOZU ZAGŁADY ŻYDÓW W BEŁŻCU[br]ZAMORDOWANY W OKRESIE[br]OD LUTEGO DO GRUDNIA 1942 ROKU[br]PRZEZ HITLEROWSKIE NIEMCY''' > > > '''ZIEMIO, NIE KRYJ MOJEJ KRWI,[br]IŻBY MÓJ KRZYK NIE USTAWAŁ![br]KSIĘGA HIOBA 16,18''' > > > > '''이곳은 50만명이 살해된 학살의 현장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이다.[br]학살을 목적으로 세워져 나치 독일에 의해 1942년 2월부터 12월까지[br]유럽의 유대인들이 야만적으로 살해되었다.''' > > > '''땅이여, 내 피를 숨기지 말고,[br]그 피가 나를 위해 계속 부르짖게 해 다오![br][[욥기]] 16:1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